느린 발걸음으로 세상을 배우는 법
예전에는 빠르게 달리던 발걸음이 어느새 느려졌다. 한때는 손에 익숙하던 일도 이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새 업무 환경에서 마주한 전문 용어들은 낯설고, 업무 설명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하다. 틈틈이 자료를 찾아 읽고, 공부도 하고, 관련 자격증까지 땄지만, 여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많다.
예전 같으면 한두 번 책을 읽고 자료를 정리하면 금방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던 것 같은데, 이제는 똑같은 문장을 세 번, 네 번 읽어도 의미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다. 처음엔 이게 단순한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아, 노화라는 게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늙어간다'는 말은 여전히 낯설다. 어쩐지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는데, 몸은 어느새 은밀하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억력은 흐릿해지고,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한 번 읽으면 이해했던 것들이 이제는 반복해야 겨우 손에 잡히고, 예전 같으면 금세 다가섰을 도전 앞에서도 망설이게 된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 바로 앞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는 운동 삼아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도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누구는 속도를 자랑하듯 뛰어가고, 누구는 다리 힘을 아껴가며 천천히 돈다. 언뜻 보면 늦은 걸음은 뒤처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빠르게 걷던 사람들이 금세 지쳐 앉는 반면, 천천히 걷던 사람들은 묵묵히 끝까지 공원을 여러 바퀴 돌아 나간다. 마치 삶의 여정과도 같다.
세상은 무섭도록 빠르게 변한다. 새로운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등장하고, 어제 배운 지식이 오늘이면 구시대 유물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안에 서 있자니 가끔은 내 걸음이 너무 느려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모든 것을 따라잡으려 애쓰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정말 모든 것을 따라잡아야만 하는 걸까?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오히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 아닐까? 남들보다 늦게 한 걸음을 떼더라도, 그 한 걸음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이 느려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흡수하고 빠르게 넘어가던 시절에는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들이, 느린 걸음 덕분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겸손함,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아스팔트 틈새로 피어난 민들레처럼, 삶은 때로 가장 척박한 곳에서도 피어난다. 거대한 숲 속 작은 들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도 충분히 아름답다. 빠르게만 살아야 할 것 같은 세상에서, 느리게 걷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진짜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자신이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떠올리려 한다. 빠른 사람도, 느린 사람도, 결국은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그 리듬을 잃지 않고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불안과 답답함을 품고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 자체로 충분한 준비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한 발짝을 내디뎌 본다. 크게 도약하지 않아도, 다만 흔들리면서도 버틸 수 있는 사람으로 느린 걸음이 모여 깊은 흔적을 만들어가야겠다.